탕핑은, 그냥 누우면 된다.
지하철, 운동장, 교실, 만리장성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든 눕는다.
나무토막처럼 누워있는 고양이와 죽 한그릇 뜰 힘조차 없이 소파에 기대 있는 밈으로 유명한 ‘탕핑주의’는 중국에서 밀레니얼과 Z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사회 현상입니다.
올 봄 중국의 청년층에서 시작된 이 사회현상에 대해 국내 언론도 몇차례 다뤘는데,
최근 중국이 ‘공동부유(모두 함께 잘살자)’를 전면에 내세우며 부의 양극화 해소를 국가 과제로 제시함에 따라 탕핑이 다시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탕핑’은 누울당 평평할 평 즉, 평평하게 눕는다는 의미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신조어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막무가내로 눕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눕게 된 이유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성공 가능성이 낮기 때문입니다.
의욕이 상실된채 누워서 하루하루를 흘러가는 대로 견뎌보겠다는 의지에 가깝습니다.)
예전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욱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고 했던 우리나라 한 광고의 카피처럼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모습만으로 그 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탕핑은 유행이 됐고 이를 활용한 각종 상품까지 쇼핑몰에서 핫 아이템으로 떠올랐습니다.
물론 실제 본인이 누워있는 모습을 찍어 올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누워있는 사진들을 활용해서 탕핑 정신에 동조하고, 탕핑적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누워있는 모든 것을 활용한 밈과 짤이 유행이 됐고, 그를 활용한 각종 상품까지 쇼핑몰에서 핫 아이템으로 떠올랐습니다.
물론 현재는 젊은 세대들에게 ‘탕핑주의’ 확산을 경계한 중국 정부에 의해 SNS의 게시글들은 삭제되고 있고, 탕핑 관련 제품들은 몰의 쇼케이스에서 사라졌습니다.
'아무것도 안하는 게 아니라 욕망이 낮은 삶을 산다'
얼핏 듣기에는 그냥 편히 살겠다는 게으름의 형태로 보일 수 있는 이 탕핑은 일종의 저항운동입니다.
2021년 4월 중국의 한청년이 SNS 글 하나를 올립니다.
누워있는 자신의 사진과 함께 ‘탕핑이 곧 정의이고, 2년동안 일자리를 가지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잘 살고 있다’는 내용.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낮은 삶을 추구 함으로써 삶의 속도를 느리고 평화롭게 만들자는 주장이었습니다.
일, 집, 결혼, 아이, 소비 이 다섯가지를 포기하고 나면 자본과 사회가 강요하는 끝없는 경쟁에 자신을 소비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순식간에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반향을 일으켰고 지지자들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누워있으면 자본이 날 착취하지 못할꺼야!
탕핑과 함께 눈 여겨 봐야 할 두가지 중요한 키워드가 있는데 바로 ‘996’과 ‘네이쥐안(involution)이란 개념입니다.
996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을 일하는 중국 청년들의 삶을 뜻하는 것으로 이렇게 열심히 일해 봤자 , 무의미한 소모성 경쟁 즉 네이쥐안이란 것. 결국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목숨 걸고 경쟁을 해야 하는지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너무 긴 노동시간, 턱없이 낮은 임금, 치솟는 집값 등으로 현실에 좌절하는 청년들이 많아지다 보니, 탕핑족의 극단적 포기주의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부의 대물림이 사회구조적으로 용인되는 중국의 경우,
극빈층은 상상이하의 생활수준을 겪고 있어 사실상 자발적 탕핑보다 타의적 탕핑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걸 듣고 나면 아마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을 것입니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도 ‘N포세대’란 말이 유행어가 됐습니다.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내집 마련이나 인간관계 더 나아가서는 꿈이나 희망까지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N포 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대학 졸업 후 반복되는 서탈(서류탈락)을 거치며 패배의 기분을 맛보고, 학자금 대출상환이나 치솟는 집값 등으로 좌절을 겪으며 단념과 회피를 선택, 욕망과 꿈, 의욕을 하나씩 접습니다.
옆 나라 일본에는 비슷한 맥락의 ‘사토리 세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토리는 사토루(悟る, 깨닫다)의 파생어로 포기를 넘어 해탈의 경지를 표현한 말입니다.
높은 청년 실업율로 좌절한 20-30대 젊은이들이 희망과 의욕도 없이 무기력한 것을 일컫습니다.
돈이나 명예 출세에 관심이 없고 정규직을 기피하고 집 마련도 포기한 채 불필요한 소비를 거부하고 출산도 포기합니다.
트렌드 언어의 해석과 문화적 코드는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사회에서 느끼는 절망감은 탕핑, 사토리, N포세대가 모두 비슷한 맥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을 포기해야 이 사회에서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N포세대는 ‘포기’라는 표현으로 자조하지만, 향후에도 물질에 대한 욕망과 가치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모순적 감정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정신적 피로도로 보자면 가장 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탈감이 크다는 건 여전히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것인데, 가질 수 없다는 단념을 매일 반복해야 할테니 말입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란 제목의 에세이가 밀레니얼의 공감을 얻으며 베스트 셀러 목록에서 오랜 시간 자리잡고 있는 걸 보며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쉽게 살려고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탕핑이 다시 화두가 되고, 기억속에서 잠깐 잊혀졌던 'N포세대'란 단어가 다시 거론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포기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는 현실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현실에 저항의식을 담아, 해탈을 담아, 혹은 분노감을 담아 시대의 어려움을 직면하는 이웃 나라와 한국의 MZ 세대를 보며, 현상을 수용하고 세상을 조롱하는 방식이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낍니다.
지나치게 진지하고 거대한 담론을 끌어왔던 우리 세대의 방식과 달리,
가벼운 단어 하나를 끌어다 그 안에 많은 문제 의식과 해석들을 담습니다.
대상을 좁히지도 않고, 표현의 한계도 없습니다.
가볍게 소비할 수 있는 단어를 집단이 해석하면서 의미를 쌓아가는 방식입니다.
밀레니얼 세대가 주축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윗 세대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현명하게 살려면,
몇 가지 트렌드 키워드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하는 MZ세대의 태도와 방식을 이해하는 게 더 중요해 보입니다.
같은 파도를 타야 세대간 소통을 넘어 동시대를 공유하는 존재로서 공감대를 가질 수 있을테니까요.
가볍게 접근해 본 주제를 정리하며 되려 마음에 큰 숙제를 하나 떠안은 듯합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숙제를 해결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맡겨버리고 지금 그냥 누워버리고 싶어졌습니다.
2021년 9월, 미국 뉴욕에 상륙한 허리케인 '아이다'의 영향으로 건물과 주택 수 십만채가 부서지고 택이 잠기면서 인명피해까지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망자의 90%가 안타깝게도 빈민가 지하층 거주자였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미국판 기생충’ 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문화는 다르지만 자연의 위력 속에 동시대의 부조리와 사회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출처:
digital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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